낯설음

드디어 낯섦의 정체가 드러났다. 나인 줄 알았던 나는 내가 아니고, 너인 줄 알았던 너는 네가 아니었다. 두꺼운 하늘의 어두운 그늘이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홀로 던져진 새끼짐승이 살던 그곳은 허공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부유浮遊했다. 

땅으로 내려왔을 때 새끼짐승은 걸음마를 시작했고 나는 이방인이 되었다. 이방인, 그것은 누가붙인 이름인가. 타인의 시선인가? 아니면 내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인가. 아무래도 상관없다. 허상의 끝에 서보니 진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 떠날 수 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고 긴 길을

그물

무언가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올 때 사람은 완벽하게 자기의 의지로만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이것은 분명 나의 결정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타자의 의지가, 어떠한 상황이 등 뒤에 몰래 숨죽이고 나의 결정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섬뜩해진다. 그럴 때면 나를 추동하는 힘에 떠밀려 헐떡거리면서 나는 막 내달린다. 반복되는 현실도피를 발판삼아 그 힘은 실체가 없는 불안으로서 나의 정신을 마비시킨다. 마치 그물에 걸린 물고기마냥 꼬리만 파닥파닥 움직이며 거의 본능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을 뿐이다. 아! 하고 깨닫는 순간 이미 상황은 저만치 나아가 있다. 그물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죽음 뿐 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은신처

인간들과의 대화는 후덥지근한 여름날씨와 같다. 그 여름의 끝에 내리는 거센 비바람에 자아를 상실한 존재가 표류한다. 참으로, 치사한 삶이구나! 인간들의 횡포로부터 달아난 새끼짐승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 그곳의 모든 문을 걸어 잠근다. 그리고 그는 어두워지기만을 기다린다. 드디어, 모든 사물이 불분명해지는 시간이 되자 인간의 소리와 사물의 소리가 사라졌다. 새끼짐승은 오로지 그 어둠속에서 맡을 수 있는 향기에만 의지한다. 완전한 격리. 여기가 그의 세상이며, 우주였다. 

레디메이드 인생

생각해보면 내 손으로 무언가를 직접 만들고 고치고 한 기억은 거의 없다. 디자인만 하고 직접 손으로 하지 않는 업무 시스템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럴 필요도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만약 이 공간을 꾸미는데 자금이 넉넉했더라면 쉽게 사람을 고용했을지도 모르겠다. 돈만 지불하면 대신 해줄 사람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원하는 디자인으로 물건을 만들 필요도 없이 근사한 제품들이 인터넷에 가득하다. 그것이 오히려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 기회를 박탈당한 인간. 지금 내가 하는 행위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난 마치 이제 막 홀로 서기를 하는 미성년 같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유형의 무능력함이었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가 말한 ‘근원적 독점’ 의 의미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참여하고 싶어 하는 의미 있는 활동을 기업의 상품이나 전문가의 서비스가 대체해버리는 것’.  사람들은 일하느라 시간이 없으니 돈을 지불하여 타인의 노동력을 사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돈은 없고 시간은 많으니 오히려 나에게는 ‘의지의 개입’ 이라는 즐거움을 발견한 샘이다. 주어진 공간에 기성품을 갖춰놓고 사는 삶. 당연하다는 듯이 고칠 필요 없는 완벽한 집을 고르고 당연히 물건을 사고 아무렇지도 않게 물건을 버린다. 인간도 역시 이 거대한 체제의 부속품으로서 소비된다. 소비가 당연시되는 사회에 대한 순응이 나의 내면을 잠식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어쩌면 주어진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과도 이어진다. 나에게 맞게 주변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상황에 나를 맞춰가는 삶이었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 또다른 의지의 개입인 ‘예술활동’ 을 통해 ‘나’ 라는 인간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계절을 보다

가을이 가고 있다. 이제 좀 있으면 눈이 오겠지, 올해도 이렇게 가는구나. 안그래도 빨리 지나가는 계절이 더 짧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마음까지 스산해지는 것 같아 쓸쓸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절이 바뀌면 우울감을 느끼기도 한다. 계절의 변화를 의식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매일 자신의 근처에 있는 나무를 관찰한다면 어떻게 될까? 여름이 지나는 비가 내리고 긴 팔을 입을 때가 되면 나무도 조금씩 새 옷을 입을 준비를 한다. 자세히 보니 나뭇잎의 색깔이 어제보다 오늘 조금 옅어졌다. 바닥에는 말라버린 나뭇잎이 하나 떨어져 있다. 그 다음날은 더 더 옅어졌다. 바닥에는 나뭇잎이 몇 개 더 떨어져 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한 달, 두 달이 지나고 나무에 매달려있는 잎사귀가 거의 다 떨어질 때까지 관찰을 해 보는 거다. 그 때가 되면 바닥에도 낙엽이 수북하다. 나뭇가지만 앙상하게 남고, 그 낙엽을 쓸고 태우고 할 때가 되면 첫 눈이 내릴 때가 온 것이다. 그러면 월동준비를 한다. 수도관이나 보일러가 파열되지 않게 천으로 감싸주고 집안 곳곳을 살핀다. 매일같이 자연의 변화를 관찰하다 보면 계절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그 냉정하게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에 마음을 다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우리일상의 눈높이 가까운 곳에서 자연을 관찰 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의 눈은 너무 높이 있다. 우리의 몸이 바닥에서 너무 높이 있기 때문이다. 낮은 곳에 있어도 우리의 눈앞은 콘크리트 벽으로 가로막혀 있고, 감상에 젖어 창밖을 보고 있을 여유도 없이 우리의 눈과 귀는 미디어에 강제로 노출되어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를 듣고, 그 나무위에서 짹짹 거리는 종달새의 소리를 듣고, 비가 온 다음날 개울가의 돌다리를 지나는 물소리를 듣고, 개울가 위의 오리가 몸단장을 하는 것을 보고, 백로가 먹이를 잡는 것을 보고, 동내 개들이 짖는 소리를 듣고, 마실 나온 할머니들의 소란스런 소리를 듣는다. 대지에서 들려오는 이 소리와 풍경의 시간들이 사치가 되지 않고 일상이 된다면 우리안의 무엇이 변할까?

2018. 빈곳에서 씀

我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