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의 변주와 심리적 경계
우리 한국인의 사주팔자에는 역마살이라는 것이 있다. 보통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되는 운명을 지칭하는 말이다. 역마라는 단어에 살殺이 붙을 정도로 과거에는 그 뜻이 부정적으로 쓰였다. 요즘에는 해외여행이 자유로워 그 뜻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나에게 있어 역마살은 단순히 집을 이사하거나 여행하거나 하는 것 이상으로 삶에 크고 작은 변화가 항상 함께했다. 그렇다면 나는 내 운명에 순응하기 위해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나의 이동이 역마살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일까? 운명이나 종교가 모든 것을 정하고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과 생각만큼 인간을 게으르게 만드는 것도 없다. 그 게으름은 자기 자신이나 타인, 모든 사건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이것은 곧 인간을 자기성찰로 부터 멀어지게 만들게 된다.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그것이었다. 내 스스로가 운명의 틀에 갇혀서 자기 삶을 탐구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 '나는 왜 이동하는가', '이동한다는 것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내가 언제까지 이동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와 같은 근본적인 이동의 배경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물리적 공간을 이동하는 것의 배경에는 모호함이 주는 불편함을 벗어나 명료한 경계 안에 나를 묶어두고 싶은 충동이 따라다녔다. 무언가에 안주하고 정착하고 안락하기위해 끊임없이 나의 정체성을 찾고 직장을 옮겨 다녔던 것이다. 나를 이동하게 만든 내적 원동력은 심리적인 편안함이었다. 그 편안함은 익숙함에서 온다. 그 익숙함은 내가 기억하는 내 삶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익숙함과 편안함이라는 틀. 나의 정체성, 나에게 맞는 직장, 나에게 맞는 직업, 나에게 맞는 공간, 나에게 맞는 물건. 이것들을 과연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나'라는 것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나. 나의 정체성. 또한 정체성이 무엇 인가에 앞서 질문해야 할 것은, 그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만약 존재한다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의 육신이 여기에 있다. 정체성은 내 육신 안에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심장이나 두뇌와 같은 곳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체성은 나의 영혼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영혼은 어디에 있나? 뇌 혹은 마음? 그것도 아니면 저 높은 어딘가에 있다는 말인가?
나의 정체성이 '실존'한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어딘가에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생각. 그것은 너무나도 강력하여, 마치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과 같이 나의 인생을 한 방향으로 끌고 갔다. 하지만, 실존한다고 믿었던 대상이 나의 인식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것은 오롯이 내가 나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더불어 나의 관점이라고 생각된 것에는 타인의 관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나를 대상화하여 판단하고 존재여부를 결정지은 것이다. 그 이후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과 나의 인식이 충돌하는 순간을 나는 종종 경험하고 있다.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를 뿐이다” -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만큼 우리는 대상을 인식할 때 우리의 기억, 즉 학습된 기억에 의해서 인식하게 된다.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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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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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Tur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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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Spain

‘공간을 이동한다’라는 행위에 나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나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장소나 환경을 벗어나 낯선 곳에 나를 위치시키는 것. 그것은 기존의 나에게 익숙한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인간이 사회에 정착하여 살 수 있는 이유는 그 사회가 제공하는 요소에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공간의 이동'이라는 행위 자체가 내가 익숙한 사회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면, 공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항상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동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공간에 머문다. 나는 공간에게 기대심을 갖고 때로는 요구하기도 한다. 우리는 공간 그 자체에 길들여져 있다. 내가 나의 정체성에 관하여 나라는 존재와 내가 인식하는 것 사이의 간극 혹은 충돌을 경험한 것처럼, 나는 공간이라는 대상에 대해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내가 거주하고 일하고 아주 잠시라도 내가 머무는 공간은 내가 원하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공간을 대상화 했으며, 다만 내가 대상화 한 공간은 나의 인식체계 안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내 인식체계 안에서의 공간은 내가 원하는 대로 존재해야만 했다. 나는 공간이 내가 인식하는 관점에서 존재하기를 원했다. 내 인식체계 안에서의 공간은 ‘안락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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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Turkey
나에게 있어 ‘안락’이 갖는 의미는 내가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나에게 어울리는 물건이 내 주변에 있으며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아야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현실에 안주를 한다거나, 모든 순간이 안락을 추구하는 데서 비롯된 결정이라거나 하는 것들이 인간을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 길들여지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ᅠ나에게 익숙한 사회의 모습에서 벗어나고자 선택한 방법이 ‘안락한 공간’을 찾기 위해 ‘공간을 이동’한 것이었다. 그만큼 나는 공간이라는 것에 길들여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ᅠ나에게 ‘공간의 이동’이라는 것은 행위의 레토릭 이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 있는 나는 또 다른 내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안락한 공간에서 나 자신을 내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존재. 마치 내가 나의 정체성에 정착하고 안주하기를 원했던 것처럼. 정체성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 나는 또 다른 안락의 대상을 찾아 헤매인다. 끊임없이 안락을 구애하는 삶. 인간이 삶에서 바라는 것을 그 외에 또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